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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13분 읽기

속터지는 독일 (2)

어영부영 메르츠

1편에서 나는 징글징글한 독일과 유럽의 규제가 산업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이야기했다. 이놈의 정부는 어깨동무를 하고 고사된 산업을 끌고 가야 하는데, 그냥 방치플 중이다. 그렇다면 이런 훌륭한 정부의 수장은 누구인가. 프리드리히 메르츠. 속 터지는 피노키오다.

피노키오는 "안 한다"고 못 박은 건 다 하고, "한다"고 약속한 건 죄다 어영부영 뭉갠다. 말과 행동이 이렇게 정반대인 정치인은 한국에서는 많이 봤지만 독일에서는 오랜만이다. 무능 숄츠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도 매우 흥미롭다. 피노키오 혹은 거짓말쟁이, 둘 중 하나만 이야기해도 독일 사람들은 다 알아듣는다.

01

"절대 안 한다"던 것들의 목록

독일 정부 청사 앞 책상에 놓인 긴 코의 나무 인형과 정책 문서

부채 브레이크부터 보자. 독일 기본법에 박힌 이 재정 규율은 CDU가 수십 년간 "우리의 DNA"라 부르며 지켜온 것이다. CDU/CSU 선거 공약집에도 또렷이 적혀 있었다. "우리는 부채 브레이크를 고수한다. 오늘의 빚은 내일의 증세다." 메르츠 본인도 선거 직전 "가까운 미래에 부채 브레이크를 개혁하는 건 배제된다"고 단언했다.

그런데 2025년 2월 총선에서 이기고 나서 겨우 일주일 남짓 만에, 총리 취임 선서를 하기도 전에, 국방비를 부채 브레이크에서 빼주고 5000억 유로짜리 특별기금을 만드는 기본법 개정을 밀어붙였다. 그리고 FAZ(신문)에 대고 이렇게 말했다. "내 개인적 신뢰성 면에서도 아주 높은 신용을 끌어다 썼다는 걸 안다." 번역하면, "공약 따위는 개밥으로 줘 버려"라는 소리다. 이후 CDU 지방 당원들조차 "당의 DNA를 배신했다"며 분노했다.

부채 브레이크는 개인적으로 없어져야 할 유물이라고 본다. 어려운 시기일수록 돈을 풀 수 있는 주체는 정부밖에 없으니까. 세상이 혼란한 지금 같은 때에는 정부가 돈을 푸는 게 맞다. 그러니 이 정책 자체는 나쁜 게 아니라고 본다. 하지만 문제는 거짓말이다. 꼼꼼한 맹박 씨도 자기 공약을 일주일 만에 뒤집는 건 안 했을 거다. 근데 피노키오는 "절대 안 한다"고 국민 눈을 보고 말해놓고 일주일 만에 뒤집었다. 피노키오의 현실 고증판인가…

증세도 똑같다. "더 성과를 낸 사람이 더 누려야 한다"며 대대적인 세금 감면을 약속했고, 2025년 8월 ZDF 여름 인터뷰에서도 "나와 함께라면 증세는 없다, 연정 합의가 있고 그게 유효하다"고 못 박았다. 그리고 뒤로는 설탕세·플라스틱세 신설에 부가가치세 인상 논의까지 기어나온다. 의료 혜택이나 복지는 대놓고 줄여가고. 뭐, 결과적으로 소득세 감면을 주긴 준다는데 빨라야 2027년이다. 세금 감면은 거의 못 받으면서 소비세는 즉시 다 문다. 역시 피노키오답다.

02

기름값 — 내알빠노 Scheißegal

2유로대 가격이 표시된 독일 주유소 가격표

이제 내가 매일 겪는 기름값 이야기를 하자.

2026년 8월, 독일의 휘발유는 리터당 2.2유로를 넘겼고 디젤도 비슷하다. 이 가격의 절반 이상이 세금이다. 에너지세, 부가세, 그리고 CO2 부담금. 원유값이 오른 건 도른푸가 싸지른 똥이니 정부 탓만 할 순 없다. 하지만 기름값의 절반을 차지하는 그 세금은 우리 똑똑한 독일 정부의 선택이고, 말이 안 통하는 혁명수비대와 달리 내리려면 내릴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럼 다른 나라들은 이 위기에 뭘 했나. 이탈리아는 2026년 3월 리터당 25센트씩 유류세를 깎았다. 스웨덴은 도로연료세를 EU 최저 수준까지 내렸다. 포르투갈은 유가가 오르면 국가가 자동으로 세금을 깎아주는 "가격 방패" 장치를 만들었다. 크로아티아는 상한제를 도입해 독일 평균가보다 확연히 낮게 묶었다. 에스토니아는 예정돼 있던 연료세 인상마저 유예했다. 다들 도른푸가 싸 놓은 똥이 위기 상황이라는 걸 인지하고, 국민을 위해 세수를 깎는 정책으로 전환했다.

독일은 딱 두 달 에너지세를 14센트 한시적으로 인하하고, 곧바로 원위치. 두 달 시늉만 하고 아무것도 안 끝났고 상황 하나 변한 게 없는데 그냥 내버려 둔다. 그리고 세상 훌륭한 정책을 하나 내놓는데, "12시에 하루 한 번만 가격을 올릴 수 있다"는 규칙이다. 우와, Klasse! 너무 똑똑한 거 아닌가? 메르츠 본인조차 의회에서 "12시 정책으로는 부족하다. 소비자가 감당할 수준으로 가격을 낮추지 못한다"고 자인했다. 감당 못 하는 가격을 만들어 놓고 정작 그 원인인 세금은 하나도 건드리지 않는다. 다 아는데 아무것도 안 하고, 문제가 뻔한데 내팽개쳐 두는 어영부영의 전설과 같은 인물이다.

다른 EU 국가들은 각국마다 자국의 유정에서 기름을 퍼 올리는 게 아니다. 똑같이 사 오고 같은 위기를 겪으면서, 국민을 지키려 세수를 깎았고 독일은 세수를 지키려 국민을 방치했다. 그래도 독일 사람은 빵빵하게 잘 사니 "이 정도는 버틸 만하겠지"라는 판단에서 나오는 문제가 아니다. 위기 앞에서 정부가 어떤 스탠스를 취했는지에 대한 문제다.

03

"환경을 위해서"라더니, 그 돈은 어디로 갔나

환경을 상징하는 저금통의 동전이 정부 예산 서류로 빠져나가는 모습

기름값 세금 중에서도 CO2 부담금은 특히 짚어야 한다. "환경을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붙인 세금이기 때문이다. 2026년 CO2 가격은 톤당 55~65유로로 또 올랐고, 이 부담금으로 걷히는 돈은 연 160억 유로가 넘는다. 명분대로라면 이 돈은 환경을 위해, 그리고 부담이 커진 국민에게 돌아가야 한다.

원래 약속이 정확히 그거였다. "기후보너스(Klimageld)". CO2세로 걷은 돈을 국민들에게 되돌려줘서, 말도 안 되게 폭등한 에너지값의 부담을 덜어주겠다는 것. 메르츠 본인도 선거 때 이 기후보너스를 지지했고, SPD와의 연정 협약에도 지급이 명시됐다. 세금 환급을 할 수 있는 기술적 기반(세금 ID와 계좌번호를 연결하는 시스템)도 느려터진 독일에서 2024년 말 이미 완성됐다. 이제는 더 이상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헛소리도 사라진 것이다.

그런데 2026년에도 기후보너스는 없다. 이 지급안은 의회에서 부결됐다. 이웃 오스트리아가 2022년부터 매년 국민에게 145~290유로씩 기후보너스를 지급해 온 것과 대조적이다. 독일 국민은 몇 년째 "준다 준다"는 말만 들었다. 그리고 메르츠 정부는 사상 최대 규모의 새 빚을 낀 2027년 예산을 짜면서, CO2세 수입을 원래 가야 할 기후·전환기금이 아니라 일반 예산으로 빼돌리기 시작했다. 환경을 위한다며 걷은 돈을 국민에게 환급하지도 않고, 환경에 쓰지도 않고, 예산 구멍을 메우는 알짜배기 재원으로 가져다 쓰겠다는 것이다. "환경을 위해서"라는 그 명분은 대체 어디로 갔고, 이름은 대체 왜 CO2세이며, 그걸 왜 기름값에서 떼 가는지. 국민들만 호구 오브 개호구 인증이다.

04

서민에겐 즉시 징수, 대기업에겐 검토만

시민에게는 즉시 돈을 걷으면서 기업 쪽은 막아둔 행정 창구

그러는 사이, 정유 대기업들은 사상 최대 이익을 냈다.

독일 연료 시장은 다섯 개 대기업(Aral, Shell, Esso, TotalEnergies, Jet)이 3분의 2를 장악하고 있다. 이들은 정유소와 파이프라인을 공동으로 굴리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하면서 한집살림을 제대로 하고 있다. 한 시장 분석가의 말이 인상적이다. 이들은 수십 년간 서로를 다 아는 사이라, 굳이 담합할 필요도 없이 그저 실시간으로 경쟁사 가격만 따라가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가가 오르면 기름을 사 오기도 전에 형제 중 하나가 기름값 로켓을 발사하고, 나머지 형제들이 줄지어 따라간다. 유가가 내리면 로켓에서 낙하산을 펼쳐 서로 눈치만 보면서 깃털처럼 천천히 내려온다.

기업 총수도 무릎을 탁 치고 갈 만한 최고의 이익 공유 기술로 양질의 땔감 호르무즈를 연료 삼아 이 회사들은 기록적인 이익을 챙겼다. (독일에서 최고로 일 잘하는) 연방카르텔청이 말하길, "가격 상승이 원유 비용 증가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정유 부문이 매우 큰 이익을 냈다"고 인정했다. 그런데 이 최고의 엘리트 기관은 명백한 담합이나 시장 지배 남용이 입증돼야만 움직일 수 있다면서, 청장 본인이 "높은 가격과 높은 이익만으로는 개입할 근거가 안 된다"고 했다. 아주 훌륭하다. 정말!

여기서 우리 피노키오는 한술 더 떠, 위기에 초과이익을 챙기는 기업에 물리자던 초과이익세를 "회의적"이라며 사실상 접었다. 카르텔청에 더 강한 감독 권한을 주겠다는 것도 발표만 있고 실행은…? 담합 입증 없이도 시장을 교정할 수 있는 법적 도구는 이미 지난 의회가 만들어뒀는데, 그걸 쓰도록 밀어붙이는 손길이 없다.

국민에게는 CO2세도, 유류세도, 부가가치세도, 그 밖에 줄줄이 붙는 세금들도 전부 그 자리에서 즉시 내라고 하고 예상되는 소득세는 선징수하여 걷는다. 반면 사상 최대 이익을 내는 대기업에게는 초과이익세도 접고, 누가 봐도 이상한 형태를 감독해야 할 기관들의 손발까지 다 묶어 놓는다. 피노키오 씨, 그 대단하던 감세는 어디로 갔고, 국민 눈을 보며 하던 그 공약들은 다 어디에 있는가?

05

남은 캐시카우마저 말려 죽인다

불이 꺼진 자동차 공장에 홀로 남은 내연기관 엔진

이 기름값 이야기는 지난 편의 산업 이야기와 곧장 이어진다.

지금 독일 자동차 산업이 그나마 세계에서 경쟁력을 지킨 마지막 영역이 바로 내연기관차다. 폭스바겐도, 벤츠도, BMW도, 전기차 전환에서는 중국에 밀렸지만 잘 만든 가솔린·디젤 엔진만큼은 여전히 이들의 캐시카우다. 그런데 이 기름값이면, 이 세금이면, 누가 그 차들을 사서 몰겠는가. 어디 꽁꽁 숨겨 놔서 보이지는 않지만 독일에서 만든 팔릴 만한 전기차라도 있는 건가?

산업을 부흥시켜야 할 때 규제로 애프터마켓을 막고(1편), 세금으로 기름값을 말아 올리고, 에너지 정책으로 전기값을 유럽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있다. 이 정도면 아마 최고가 될 부분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우리 위대한 독일은 나라의 대들보인 제조사들의 먹거리, 사실상 그들의 마지막 음식인 내연기관차로도 연명할 수 없게 정책적으로 밥그릇을 다 차 버리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에 적응할 힘을 잃어버린 후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채 가지만 다 자르고 있다.

06

결론 — 누구를 위한 정부인가

독일 정부 청사에서 멀리 떨어진 채 기다리는 시민들

이쯤에서 냉정하게 물어보자. 이 정부는 대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메르츠는 하는 것마다 국민이 싫어하는 방향으로 간다. 이 정도면 뇌 속에 국민의 극혐 순위를 산출하는 메타 지표라도 있는 것 같다. 그 지표를 공략집 삼아 매번 차는 똥볼들로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2026년 8월, 여론조사에서 AfD는 28%로 다섯 달 연속 제1당이다. 반면 메르츠 개인 지지율은 만족 14%, 개인 호감도는 역대 최저치를 찍었다. 취임 100일 만에 국민이 등을 돌렸고, 그 등 돌린 민심은 AfD로 흘러갔다.

우리 위대한 피노키오는 국민이 싫어할 짓만 골라 해서 기성 정치에 대한 환멸을 극대화하고, 그 반사이익을 전부 AfD에 몰아주고 있다. 이게 CDU 총리가 맞나? 아니면 결과만 놓고 보면, AfD를 위해 일하는 이중대인가?

왜 그를 피노키오라 부르는지, 거짓말쟁이라고 부르는지에는 이미 충분한 이유가 있다. 동화 속 피노키오는 마지막엔 거짓말을 뉘우치고 진짜 사람이 됐는데, 메르츠에게 그런 결말이 올지는, 글쎄. 길어지는 코는 계속 보이는데 뉘우쳐 사람이 되기는커녕, 지금은 국민들에게 걷어차여 장작불의 불쏘시개로나 타지 않으면 다행이겠다.